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标题 | 11월 공휴일 안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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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传日期 | 2013-10-28 |
안녕하세요^^
11월 공휴일에 대하여 알려 드리겠습니다.
11월 1일(금) / 2일(토)은 All Saints Day) 11월 30일(토)은 보니파시오 데이(Bonifacio Day)로 필리핀 공휴일입니다.
11월 2일 / 30일은 토요일로 원래 수업이 없는 날이며, 11월 1일(금)은 필리핀 공휴일로 수업이 없는날 입니다. 학생여러분들 참고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11월1일 부터의 연휴를 이용 여행을 준비하는 학생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여행시 항상 안전사고에 유의해주시고 바라며, 즐거운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아래 필리핀 공휴일에 대하여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필리핀에서 연수를 하고 있는 만큼 무슨 공휴일인지 알고 계시는것도 좋겠죠?^^
11월 1일(금) / 2일(토)은 all soul's day로 모든 카톨릭 국가에선 이 날을 국경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역시 국교가 카톨릭인지라 11월 2일을 휴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all soul's day란 우리나라로 따지면 추석과도 같은 큰 명절로서 필리핀사람들은 그들이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죽은 이를 찾아 지방에 있는 묘지로 떠나는 날입니다.
11월 30일(일)은 보니파시오 데이(Bonifacio Day)로 이날은 필리핀의 영웅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를 기리는 날입니다.
필리핀 역사에 획을 긋는 세 명의 영웅을 꼽자면 마젤란의 공격을 막아내고, 그를 죽인 막탐섬의 추장'라푸라푸'와 평화적인 개혁을 기대했던 정신적 지도자 ‘호세리잘'
그리고 혁명의 기틀을 마련한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es Bonifacio, 1863-1897)'를 꼽을 수 있다.
물론 이들 외에도 훌륭한 지도자나 인물들이 많았으나 이들은 어려운 시기, 자신을 희생해 가며 조국과 민족을 위해 앞장 선 이들이기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이들을 기리고 있는 것입니다.
필리핀 역사에 있어서 보니파시오가 지닌 의미는 개혁을 주장하다 앞서 처형된 ‘리잘'과는 달리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방법(무장혁명)으로 완전독립을 추구했다는 데 있습니다.
보니파시오는 1863년 인트라무스 옆 가난한 판잣집 밀집지역인 톤도(Tondo)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성안쪽에 사는 스페인 사람들과는 달리 성 바깥쪽에 사는 빈민들은 늘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콜레라와 결핵이 만연했고, 태풍으로 판잣집과 농장 등이 파괴되어 늘 생필품과 음식이 모자랐으며, 보니파시오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881년 앓던 결핵으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1년 후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으며, 14살 보니파시오에게 남겨진 것은 돌보아야 할 5명의 어린 동생들뿐이었으며,
그는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또 항상 돈 벌 궁리를 하여, 타일공장에서 창고지기 생활도 했으며 아버지에게서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지팡이나 종이, 펜등의 잡화를 동생들과 함께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 그였지만 그는 매우 똑똑한 소년이었으며, 페인어를 알고 약간의 영어를 구사했으며, 독학을 통해 뒤마, 프랑스 혁명, 정치, 법, 외국소설, 종교 등에 관한 책을 읽으며 필리핀 사람들도 스페인 사람들에게 억압당하지 않고 똑같은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권리에 대한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필리핀을 정복하고 나서 그들이 말하는 자유와 평등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 보니파시오는 호세 리잘 박사의 책을 읽기 시작했으며, 그러나 반폭력을 주장하는 리잘의 저항은 스페인군에 의한 처형으로 끝이 나게 되고 이를 지켜 본 보니파시오는 무장 혁명만이 필리핀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킬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으며, 니파시오가 29세 되던 해인 1892년 그는 카티푸난(Katipunan)이란 비밀혁명 단체를 조직해
조국 필리핀의 독립을 위해 계획을 하나씩 준비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단체의 회원은 계속 늘어나고 급기야 10만을 넘기는 규모로 발전해 나가자 스페인 당국 역시 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게 되었으며, 이윽고 스페인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장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으나 무기와 병력의 열세에 놓여있던 카티푸난 멤버들은 스페인군의 저항에 밀려 북부 몬탈반으로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1897년 테제로스에서 열린 회의에서 지역 부장이었던 아귀날도가 필리핀 초대 과도 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그는 보니파시오를 반역죄로 몰아 재판에 회부해 총살시켰으며,이때가 34살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보니파시오의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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